Notice: Undefined variable: subid in D:\swww\wp-content\plugins\ultimate-member-navigation-menu\includes\class-umnm-front-menus.php on line 259

[이스라엘 체류기] 유대 민족주의의 두 성소 마사다와 야드바셈

글쓴이 | 이문식

Never Again, Masada!
예루살렘은 해발 808m의 산위에 세워진 도시다. 반면에 사해는 바다 표면보다 400m 낮은 지역이다. 그 차이가 무려 한국의 치악산의 높이와 버금가는 1200m이다. 이 높이를 한 시간 만에 자동차로 내려가는 고속도로가 예루살렘부터 사해 북부까지 놓여있다. 사해 북부에서 사해 남부까지는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이사해 남부지역에 유명한 마사다(Masada) 유적지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소년 때부터 이 유적지를 방문한다. 청소년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국토 순례단이 꼭 들리는 곳이 바로 이 마사다 요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도 이곳에 정신 훈련차 자주 방문한다. 한마디로 마사다 유적지는 이스라엘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외세에 대한 저항정신을 함양하는 유대민족주의의 지성소와 같은 곳이다.

마사다는 대 헤롯이 BC 37년에 자신의 궁전을 지은 장소로써, 이곳은 사해를 내려다보는 해발 396m의 고지인데 절벽 위 꼭대기에 길이 304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608m에 불과한 협소한 장소이다. 이곳에 헤롯대왕은 호화로운 저택과 사해를 내려다보는 3개의 절벽 끝 테라스, 로마양식의 목욕탕, 창고와 주택, 방어벽이 있는 성벽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는 돌로 지어진 회당(Synagogue)을 지었다. 그리고 절벽 꼭대기 바위 속에 4000㎥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지를 무려 열두 개나 파놓고 외부의 공격에 오랜 항전을 할 수 있는 총 75만ℓ의 놀라운 물 공급 체계를 갖추어 놓았다는 것이다.

AD 70 – AD 73년까지 이 요새에서 유대 민족주의 무장 투쟁 분파인 열심당 전사들은 무려 2년이 넘게 당시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가 이끄는 제 10 군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이 최후의 전사들은 AD73년 끝까지 적에게 투항하지 않고 집단 자살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마사다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 Elazsr ben Yair)’가 이끄는 총 960명의 열심당원이 있었는데 AD73년 4월 16일 마사다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우상숭배자인 로마인들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자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호소했다. 이에 동의한 열심당원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손으로 가족들을 죽이고 다시 모여, 10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뽑힌 한 사람이 나머지 9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하여 치렀다. 최후에 남은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요새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들뿐이었고 바로 이들이 이 장렬한 마사다 항전의 최후를 역사에 증언하였다.

비록 당대의 역사 속에서 AD 70년의 유대 독립 운동은 로마군에 의하여 실패하였으나 마사다의 전사들은 끝까지 패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더 영원한 저항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마사다 요새는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역사 현장으로써 온 국민을 단합시킨다. 이곳에서 이들은 ‘Never Again Masada’ 라고 외친다. ‘마사다와 같은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마사다는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고취시키는 유대민족주의의 성소로 다시 부활했다. 1968년 독일의 이스라엘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에 의해서 발굴된 이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온 세계의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Never forget, Holocaust!
예루살렘 시내 외곽의 Mt. Herzel에 도착하면 유명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Yad Bashem Holocaust Museum)’이 나온다. 강화 콘크리트와 유리로 지어진 포스트 모던적 건물인 이 박물관은 건축가 모세 샤프디 (1938년)의 작품이다. ‘마크 어빙’이란 사람이 쓴 ‘죽기 전에 꼭 보아야할 세계의 건축 1001’에 들어있는 이 박물관은 건축학적으로도 빼어난 건물로써 명성이 높아 전 세계 건축학도들이 견학 오는 장소이기도하다.

 

52_84_5515

▲ 야드바셈 ‘기억의 홀’

 

‘야드 바셈’의 뜻은 ‘기념비와 이름’이다. 한 마디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라는 의미이다. 야드 바셈은 역사적으로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 학살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일어났는지를 아주 잘 정돈된 갤러리를 통하여 아주 효과적으로 학습시킨다. 이 갤러리를 걸어가는 동안에 방문객들은 ‘인간악의 끔찍함’을 직시하게 된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이중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 홀로코스트에서 직면한 인간의 모습은 한마디로 ‘극단적인 악(The Extrime Evil)’ 그 자체이다. 나는 이 갤러리 안에서 만난 수많은 유대인 청년들 그리고 군인들의 검은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깊은 고통과 분노를 보면서 무엇인가에 대해서 불현듯 두려워졌다. 혹시 이 전시관은 또 다른 국민적 분노를 일깨우려는 국가주의적 목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닌가? 아니면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을 이끌어 내는 휴머니즘의 고통스러운 호소인가? 동시에, 왜 이들은 자신들이 당한 아픔은 이렇게 무섭게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이미 당한 그 비인간적인 고통을 왜 또다시 팔레스타인들에게 가하고 있는가? 라는 혼란이 내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 박물관의 전시실은 점점 좁아지며 지하로 내려가는 건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있는 10개의 작은 전시실들은 점점 어두워진다. 어두움 속으로 내려가는 갤러리 통로는 마치 인류역사상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과거로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킨다. 약 180m가량의 긴 갤러리 통로의 마지막은 이 뮤지엄의 건립목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억의 홀’로 이어진다. ‘기억의 홀’ 한가운데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고, 바닥에는 유럽전역에 있던 주요 나치스강제수용소 22곳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이름의 홀’에는 홀로 코스트의 희생자 600명의 사진이 빡빡하게 붙어있는 원통형 뿔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물이 가득 담겨있는 돌을 깎아 만든 원뿔형 구조물이 있다. 천장 원뿔 안에 있는 600여명의 얼굴이 이 바닥 원뿔에 채워져 있는 물 표면에 그대로 반사되어 비친다. 맑은 물에 비춰지는 이 600명의 얼굴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과 순교자들이다. 전시실의 원형 벽에는 60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가득 기록되어져 있다. 그 사이 군데군데 비어있는 여백은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의 이름을 위해 남겨진 공간이다. 그리고 전시실 안에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고 있다. 수년에 걸쳐 약 300만 명의 이름이 이 전시실 안에서 나지막이 되뇌여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30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미확인 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이나 개인정보를 박물관 웹사이트에 누군가가 직접 입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인터넷을 통하여 전 세계로부터 이들의 잊어버린 이름을 다시 찾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Never forget)’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은 이 ‘야드 바셈 뮤지엄’을 통하여 유럽에서 겪었던 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이 두 장소 마사다(Masada)와 야드바셈(Yad Bashem)은 이스라엘의 국민정신을 하나로 빚는 곳이다. 그러나 이 두 곳에서 형성되는 이스라엘의 국민의식은 명랑하고 밝기보다는 어둡고 비장하다. 나는 어딘지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이어지는 이 역사의 순환 고리를 보면서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인류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느꼈다. 폭력에서 폭력으로, 분노에서 분노로, 증오에서 증오로 이어지는 어두움의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Memory)’이 아니라 ‘원수사랑(Agape)’이다. 이스라엘은 ‘용서’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에 머물 뿐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용서와 기억의 한계는 어두움의 한계이다. 사랑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이 기억은 결코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 땅에는 또다시 울부짖는 팔레스타인들의 분노와 테러, 보복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1948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대부분은 미국행을 택했고 소수가 또다시 미래가 불안정한 이스라엘을 택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던 토박이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사실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거주할 당시 팔레스타인에 건너가서 시온주의 운동을 벌렸던 열렬한 유대 민족주의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적극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독립보다는 유럽에서의 안정된 귀화에 깊이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토박이 이스라엘인들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로서 그들 자신이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서 벌인 영웅적 투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반하여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비참한 포로요, 무기력한 패배적 유대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자들은 귀환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무정하게 또다시 수용소에 수용시켰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전염병예방과 건강검진이라는 이름으로 DDT같은 화학 세제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뿌려대는 모욕적인 과정을 또다시 겪어야 했다. 필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가 또다시 연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로부터 받은 배상금 때문에 경제적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들은 토박이 이스라엘인과 같은 유럽계 이스라엘인으로 동화되며 서서히 그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처럼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이 유럽계 토박이 이스라엘인(아슈케나지, Ashkenazy)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독일인들의 돈이었다.

대표적인 시온주의자인 초대 대통령 벤구리온(Ben Gurion)은 이스라엘 안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열정을 보이며 초강대국 미국과의 동맹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친미주의자였다. 동시에 전후 독일과의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1952년 벤구리온은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새로운 독일을 인정할 것을 주창한 바 있었다. 벤구리온의 이 주장은 아직도 독일에 대한 강한 분노와 증오를 가지고 있던 기존 정치권과 전후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홀로코스트출신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떠들썩하고 폭력적인 반대를 천명하였는데 제1야당(헤루트당, Herut)의 지도자인 메나헴 베긴(Menachem Wolfovitch Begin)이 이들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결국 10년에 걸친 오랜 갈등을 거쳐서 이스라엘 정부는 1962년에 ‘나치 처벌법’을 사용하여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을 납치하여 이스라엘 법정에 세우고 처형함으로서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회 정치적으로 해소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독일과의 경제적 연계를 큰 소동 없이 공식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외쳐진 구호가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Never forget)’였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한 기념물을 건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야드 바셈’이다. 야드 바셈은 그런 의미에서 홀로코스트 유대인들에게는 역설적이고 이중적인 공간이다. 용서함으로써 신 독일과의 경제적 연대에 성공하였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리고 ‘야드 바셈’을 세웠다. 오직 잊지 않기 위해서…이처럼 야드 바셈은 현실적 필요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절묘하게 결합된 역사적 공간이다. 인간의 죄는 역사적 과정에서 선과 악을 명료히 가를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야드 바셈도 이처럼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미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야드 바셈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유대인학살을 방관하고 침묵했던 서구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야드 바셈에서 자신들이 암묵적 동의로 저지른 엄청난 죄악 앞에 깊은 자책감을 갖는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곧바로 유대인들을 향한 빚진 마음이 된다. 결국 야드 바셈은 양심적인 서구 크리스천들을 친 이스라엘 정서로 이끄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런 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영악함을 보이고 있다.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이등국민인 북아프리카 출신 유대인들이나 팔레스타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홀로코스트 이미지를 활용한다. 오늘날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들의 테러에 대하여 민간인까지도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보복을 행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도덕적 비판을 받을 때마다 자국이야말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세운 유일한 정당한 공동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서구사회의 비판을 쉽게 잠재운다. 오늘날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과잉 안보를 정당화 시키는 국제 여론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한 역사적 역설이다. 희생자들의 기념물이 어느덧 또 다른 가해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마사다와 야드바셈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의 두 지성소이다. 이곳에서 나는 유대민족의 강한 저항정신과 역사적 교훈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그 노력 앞에 감탄하면서도 세계 평화와 전 인류적 사랑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들의 깊은 어두움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저항과 기억과 용서에만 머물 뿐 화해와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유대정신의 한계 때문이리라……. 여전히 21세기 유대인공동체는 또다시 원수 사랑의 십자가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